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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존재(Existence), 자아(Ego) 그리고 드러나는 나

by 홍보살 2026. 1. 27.

인간은 태초부터 고등한 사유의 능력을 지닌 뇌를 부여받는다.
존재는 끊임없이 물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이 심오한 질문이야말로 신화의 장막을 걷어내고 철학이라는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연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와 현상의 근원적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 참된 지식(epistēmē)이자 지혜(sophia)에 이르는 길이라고 통찰했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를 사랑하며(philos) 추구하는 행위
그것이 바로 철학(philosophia)임을 밝힌 바 있다.

본질적으로 자아라는 개념은 유전자 번식이라는 생존 본능의 단순한 명령에 불과한 것인지,
혹은 그 이상의 심오한 의미를 지닌 것인지,
그 해답은 여전히 명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갈망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제 이 '에고(Ego)'를 둘러싼 현자들의 지혜와 시대의 담론들을 살펴보자.


ego


존재 또는 실존으로 번역되는 'Existence'의 어원은 라틴어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ex'는 '외부'를, 'sist'는 '세우다'라는 의미의 'sistere'에서 유래한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겠으나 이러한 어원에서 우리는 개개인의 실존이 자기 자신을 외부의 시선으로 관조할 때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철학적 함의를 읽어낼 수 있다.





칸트선생에게 있어 초월이란 보편적 도덕법칙인 '정언명령'에 그 기반을 둔다.

이 보편적 도덕법칙은 다원적이고 역동적인 개개인의 자아들이 서로 균질화된 시선들의 교집합이자 합집합을 이룬다.

궁극적으로 초월이란 보편적 도덕법칙으로 포용된 다양한 시선들의 경험적 한계를 넘어
자유롭고 이성적인 주체로서의 존엄한 자아를 깨닫는 과정을 의미한다.

결국 칸트선생 또한 자아는 고립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선을 수용하는 과정 속에서 발견된다고 설파한 것이다.





헤겔선생은 '예나 실재철학'을 통해 이러한 사유를 더욱 확증적으로 전개한다.
그는 타자(외부)의 시선으로 자신을 관조하고 또한 타자로부터 인정받는 '인정투쟁'의 변증법적 과정 속에서 자아가 형성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헤겔선생 역시 칸트선생과 궤를 같이하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아의 본질을 찾았다.




그렇다면 인간학적 유물론자인 포이어바흐의 통찰은 어떠했을까?

그는 신(神)을 초월에 대한 인간의 숙원이 투사되어 외재화된 존재로 정의한다.
즉 인간이 스스로 창조하고 외부화한 신이라는 존재가 역설적으로 인간을 규정하고 평가하는 외부적 시선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에 의지한 자아는 인간 본질이 투사되어 객관화된 환상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유물론자답게 포이어바흐는 자아에 대해 간결하게 정의한다.

You are what you eat. - 인간은 그가 먹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 나아가 자아마저도 섭취하는 음식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다.
중국 속담의

마음으로 통하는 으뜸가는 길은 밥통이다


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포이어바흐의 통찰의 여기서 끝은 아니다.
그는 실존에 있어 타자의 필연성을 역설하며
"의식은 오직 '나'와 '너'의 차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너' 없이는 '나' 없고, '나' 없이는 '너'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차이'하면 떠오르는 들뢰즈의 '차이' 개념과 비교해보면

포이어바흐의 '차이'가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대칭적 관계에 가깝다면
들뢰즈는 '차이'가 고정된 정체성을 깨고 새로운 자아로 변이하는 역동적 원동력이 된다고 주장한다.



조지 허버트 미드 교수는 사회 심리학적 관점에서
'주격 나(I)'와 타인의 기대 및 사회적 시선에 의해 분화된 자아인 '나(Me)'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 과정을 통해 인간이 현존한다고 설파한다.

결국 타자의 시선과 나의 내적 시선 간의 역동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비로소 자아의 본질을 찾아낼 수 있다는 의미다.



비록 다소 산발적으로 정리된 듯 보이나 이 모든 사유의 핵심은 자아가 단 하나의 시선으로 온전히 규정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제 '다중 자아'를 설파한 사상가들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러시아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우스벤스키는 인간이 하나의 독립된 자아가 아닌 서로 단절된 수많은 작은 자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칼 융의 그림자 이론은 다중 자아의 어두운 면모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림자는 단순히 열등하고, 원시적이며, 미숙하고, 부적응적인 것일 뿐, 완전히 사악한 것은 아니야.
심지어 인간의 삶을 활기차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유아적이거나 원초적인 자질마저 지니고 있으나, 관습이 이를 억누를 뿐이다.
...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는다면, 무의식은 당신 삶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며, 당신은 이를 '운명'이라 부를 것이다.


융은 그림자가 단지 억압된 자기 모습의 일부임을 강조하며 이를 인지하고 통합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말년의 니체는 글 속에서 이러한 다중성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꿰뚫어 보았다.

나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럿이며, 변화하면서도 변치 않고 남아 있으며, 알고, 느끼고, 바라는 존재만이 나의 유일한 현실임을 이해한다.


장자크 루소는 [고백록]을 통해 [에밀]의 저자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자식을 버린 아비로서의 모순적 다중 인격이 지닌 죄책감을 가감 없이 고백하며

부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자는 부친이 될 자격이 없다.


는 뼈아픈 자성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결국 한 개인의 자아(Ego)는 다양한 환경과 타자의 시선 속에서 역동적으로 생성되고 소멸하며 무한한 자아 혹은 페르소나를 지니게 된다.

오늘날 흔히 활용되는 MBTI조차도 늘 동일한 결과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나'라는 존재는 단 하나의 패턴으로 규정될 수 없는 복합적인 총체인 것이다.
자아의 다양성을 부정하기보다 존재의 모든 측면을 이해하고 섬세하게 조율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선자령

버려야 할 특성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관리해야 할 것이 있을 뿐입니다. – [모든 삶은 빛난다]

#ego, #자아, #exist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