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첫번째 독후와 마찬가지로 사견과 별도 인용구는 붉은색으로
이외 모든 책꼽문은 검정색으로 표현한다.

"서사적 중력의 중심"
나의 오감으로 느낀 나와 타인의 이야기들이 수렴되는 가상의 공간 속 주인공을 "자아"라고 대니얼 데닛이라는 철학자의 말을 인용한 것
...
러시아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P.D 우스펜스키는...
인간은 하나의 독자적인 큰 자아가 아니라,
거의 항상 서로 단절되어 있는 끝없이 다양한 작은 자아들을 갖고 있다고 설명..
...
니체는 자아란 "많은 영혼들의 사회적 구성"이라고 정의..
어떤 개인이 드러내 보이는 자아는 그 순간 가장 강한 자아이자 하나의 정신 속에 공존하는 의식의 개체들을 연합하는 특정 시기에 가장 유능한 자아입니다.
...
행복해지기 위한 첫번째 단계는 불행을 피해야 할 곳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삼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불행의 존엄성을 인정해야만 우리는 완전히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
일관성은 라틴어 cum haerere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직역하면 "함께 수용함"을 뜻합니다.
당신이 과거에 해온 대로만 행동하지 않고,
어쩌면 갓 탄생했을지도 모르는 당신의 각 부분에 공간을 제공하고 귀를 기울이며 신경을 쓸때 당신은 일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일관성은 매일 새로워져야 하는 자신과의 즐거운 합의입니다.
이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이지요.
스스로를 혹사할 계획을 세워 자신의 삶을 힘든 비지니스로 만드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
도구가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당신의 개화 여정을 곤란하게 하는 방해물이 될 수 있고,
당신은 인정 욕구와 평판, 직장내 권력관계에 의존하게끔 만들 수 있습니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라고 말한 칸트의 정언명령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이는 도구가 목적 자체가 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타율적인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행위가 되고
이는 주체의 자율성과 자유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이 된다는 의미
...
소명은 재능을 이용할 수는 있지만 재능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재능은 키워지고 훈련되고 모습을 드러내기를 원하는 반면,
소명은 고요한 침묵의 순간들을 필요로 합니다.
마치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 같은 느낌..
소명의 길 위에서는 어느 순간 당신이 하는 일로부터 순수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고,
성공이나 돈, 인정등 나머지는 모두 군더더기가 됩니다.
도달해야 할 결승점이나 얻어야 할 보상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명은 단순한 만족이나 포만감과 거리가 멀고 강요된 목표도 아닌 사색 속에서 발견해가는 나만의 여정을 의미
개인 개화에는 끝이 없으며,
우리가 마침내 도달해야 할 목적지 같은 건 애당초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목적지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미친 듯이 달리는 사람들의 환상이라는 걸 보았지요...
소명을 따르는 일의 의미가 목표가 아니라 과정에 있다는 것...
소명의 길은 "그 길을 따르는 한 당신이 여정과 하나가 되는" 그런 길입니다.
제 세상을 만난 물고기처럼,
때로는 피곤하더라도 의미를 인지하며 움직임과 멈춤 사이에서 중용을 찾는 것 입니다.
...
이탈리아어 simplice(간단하다)는 "주름이 없다"는 뜻의 라틴어 simplex 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주름 없는 삶 속에 있다는 것은 사실 앎보다는 무감각에 휠씬 가깝기 때문입니다.
시련이나 굴곡 없이 평탄하게 계속 산다는 것은 구김살을 펴려고 애를 쓸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
우리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 속에 살고 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세상에 발견할 게 얼마나 많은지를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바로 두려움의 산물인 우이의 이런 오만함입니다.
사실, 알면 알수록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더욱더 깨닫게 되고,
아는 것이 적을수록 모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깊이 들어갈수록 처음에 손에 닿을 것 같았던 그 밑바닥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더더욱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오늘날 힘을 가진 사람은 많은 열쇠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어디로 갈지를 알고 휩쓸려 가라앉지 않는 사람,
거절해야 할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비결은 가능한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알 가치가 있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
망신 당하지 않기 위해 평범함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겁니다.
온라인은 이제 하고 싶은 말과 말해도 비난받지 않을 말 사이에서 하향 타협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우리는 결속되지 않은 채 과잉연결되어 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 간의 연결은 되어 있으나 사람들에게의 연결은 끊어졌습니다.
다른 사람과 실제로 접촉하기보다는 연결의 도구에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플랫폼등을 통한 사람들 간의 연결은 역설적으로 결속의 부재와 고립감을 심화시키고 유대감이나 신뢰는 약해진다는 의미
...
우리는 내면의 공허함을 채우는 방법을 모르고 그것에 죄책감을 느끼지만,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우리가 이끌어내는 전략은 오히려 살실감만 키울 뿐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항상 더 나은 성과를 요구하고 스스로와 세상의 기대를 맞추지 못하면 자신을 나쁘게 대합니다.
수행 불안은 매일 있는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주입하는 일종의 도핑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시대의 산물이며 집단적인 문제로 해결책 또한 집단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문화산업은 대중을 동질화하고 그들의 욕망을 조작하여 체제 유지를 돕는다 - [계몽의 변증법] 아도르노"
푸고의 규율권력과 마찬가지로 아도느로 역시 공허함을 채우려는 습성역시 규율권력에 의해 동질화된 군중의 그늘로 본다.
...
"가까이서 보면 아무도 정상이 아니다."
- 프랑코 바질리아
타인에게서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인간 존재를 탐구하는 열쇠입니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경계가 명확할 수 없다는 의미로 사람들은 모두 (그저) 다르다는 의미로 해석되며
이런 편견을 깨고 보면 레비나스의 근원적 타자성의 시선으로 절대 포섭 불가능한 타인과 마주할때의 책임감과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방법을 배우라는 의미
...
"잠이 육체적 유식의 절정인 것처럼
지루함은 영적 유식의 절정"
- [피로사회] 한병철
...
"선택이 필요하다.
삶을 살 것인가,이야기할 것인가
살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구토] 샤르트르
그냥 맹목적으로 살것인가, 아니면 관조하고 드라마틱한 삶을 살 것인가
맹목적인 삶에는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경험과 해석,
감정들을 하나로 묶는 이야기라는 실마리가 없었다면 세상은 어떻게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에 과거는 연결되지 않은 돌연변이 조각들의 연속으로 보일 것입니다...
삶의 이야기를 수정하고 재구성하는 것은 학습 장애 등의 인지 장애나 정서 장애를 치료하는 데도 매우 유용하다는 게 입증되었습니다.
거짓말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삶을 편집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
개인들이 회복력을 가지려는 건 대체로 체념과 만성 불안 속에 살면서,
사물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거나 삶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게 두려워서입니다.
마지못해 취하는 자연스러운 태도죠.
"회복력은 자유주의에서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근본적인 정치적 전환의 일부이며,
파괴적이고 만 인도주의적인 함의가 담긴 새로운 파시즘입니다."
- [국가가 조장하는 위험들] - 에반스 & 리드
국가의 역할 축소와 책임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회복력)는 의미로
사회 구조적 문제를 개인이 해결해야할 문제로 프레이밍 시킨다
회복력이 있는 몸은 수동적인 만면 저항하는 몸은 대립하는 힘에 부상과 변형을 겪으며,
현재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는 살아 있는 몸입니다.
고통과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맞서는 것입니다...
(이) 저항력은 니체가 능동적 허무주의라고 부르는 개념의 출발점입니다...
수동적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능동적인 허무주의자들 또한 삶의 의미가 없을을 자각하지만,
그저 되는 대로 자포자기하는 게 아니라삶의 복잡함과 혼돈을 인정합니다.
...
샤르트르에게 자유는 계획을 무無에서부터 실현하고,
지속적으로 생신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자기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외부, 즉 세상 속에서 자신을 잃는 것입니다.
존재하다의 어원인 ex-sistere는 항데거에 따르면 "외부에 있다", "자신으로부터 나오다"라는 뜻입니다.
당신은 죽을 운명인 인간입니다.
그렇습니다.
격렬하게 살되 명예, 환호, 승리를 너무 중요하게 여기지는 마세요.
중요한 것은 존재를 빛나게 하는 것이고,
당신의 소명과 일치하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지요.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인 것처럼 모든 일을 한다면,
목적 없이 방황하는 것을 멈추고 감정이 이성의 말을 더 이상 뛰어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위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괴팍하기를 멈출 것입니다." - 아우렐이우스
이것이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의 의미입니다.
세네카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하루는 매일과 같다)을 인용한 후
하루하루는 마치 그것이 결국 무리로 모여 인생을 채우고 끈내는 것처럼 정비되어야 한다."라고 썻습니다.
하루의 물리적 길이가 전체 삶속의 일부지만 마치 프랙탈(Fractal:부분과 전체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과 같다는 것이다.

...
감정은 우리를 움직이는 연료,
소망은 우리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화살,
재능은 그곳으로 가기 위해 우리가 가진 도구,
소명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갖는 감각,
절제는 우리가 그 여정을 따라 느끼는 균형감과 책임감, 자기 통제입니다.
에픽테토스가 설명하길,
당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당신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 일에서 비롯된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입니다...
"주님,
제게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또 그 둘의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 [평온을 비는 기도] 라인홀드 니버
...
낙관주의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부정적인 감정을 숨깁니다.
앞서 얘기했듯,
장애물은 사실 중요한 연료가 되므로 결코 비난해서는 안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만약 불안하고 두렵다면 그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세요.
그래야만 장애물이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는 건 그것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인정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세상을 사는 관점을 언제든 당신의 마음 내키는 대로 바꾸는 법을 배우세요.
그렇다면
"진정한 나"는 과연 무엇이고
"행복"은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생각하는 자아는
인간이 호흡하는 내내 만들어지고 소멸하는 과정속 공진화하는 역동적인 삶의 여정 속 다수의 다이몬이 아닐까 싶다.
행복의 문제는 내면에 잠재된 이 수많은 자아들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가 아닐까?
언제나 최선의 방법과 최고의 상과 혹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학습된 하나의 자아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강박은 오히려 주체의 본질을 갉아먹을 뿐이다.
모든 선택에 내재된 그 다양성과 불가피성을, 심지어 고통까지 존엄하게 인정할 때야
비로소 행복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까?
나의 삶을 나만의 이야기로 만들자

#서사적 중력의 중심, #하루는 매일과 같다, #모든 삶은 빛난다, #프렉탈, #헤라클레이토스
'끄적끄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주막 (1) | 2026.02.04 |
|---|---|
| [모든 삶은 빛난다] 독후 1 중용 그리고 지루함 (3) | 2026.01.29 |
| 존재(Existence), 자아(Ego) 그리고 드러나는 나 (1) | 2026.01.27 |
| 선택의 존엄 (0) | 2026.01.26 |
| [조국의 법고전 산책] 독후3. 몽테스키외 권력의 본질 (1) | 2026.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