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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독후 - 규율권력과 멸시

by 홍보살 2025. 12. 31.

교육제도는 문화자본의 불평등한 분포를 재생산하며,
따라서 사회 공간의 기존 구조를 재생산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한다.
[상속자들] - 부르디외 & 파스롱"

규율권력
이십대들에게 개인의 고통은 그보다 더한 고통을 이겨낸 누군가를 본받으면서 마땅히 참아야 할 것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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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대한 공감력이 떨어지면 필연적으로 특정 대상에 대한 기존의 편견이 더 강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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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 클수록 비교적 안전한 "기존의 길"에 대한 선호 역시 커진다.
더 나아가선 그 길만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고,
다른 길은 거들떠보지도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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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외 길"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만들어내는 건 시간 문제다.
다름에 대한 거부감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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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안의 고통은 어디에다 하소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걸로 생각하는 게 속 편하다.
취업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 혹은 정규직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자신의 삶이 실패한 것으로 규정되고 온갖 낙인이 박히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이다.
.. 경쟁이 내면화된 세상에서 개인의 공통체의식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가희 고통의 무한경쟁의 시대라 칭할 만한 구절이다.

레비나스의 말을 변주해보면 고통의 정량화는 타인의 얼굴을 대상(상품)으로 전락시킨다고 한다.
이는 고통에 대한 empathy 혹은 compassion 이 아닌 단순히 제거 대상 혹은 처리 대상으로 간주할 뿐더러
최악의 경우 무시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각종 미디어가 경쟁적으로 투사하는 고통들이 이를 더 부추기고
이렇듯 고통의 실체없는 기준의 정량화는 주관적 실존 자체의 부정으로 자기기만과 무화의 선순환 고리를 끊어 버린다.

이는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게 만드는 편견의 고도화로
신자유주의가 그토록 외치는 개인의 나약함에 대한 혐오와 분열의 맹아로 자리 잡는다.


차별은 해선 안되지만 차이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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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경험을 통해 받아들인 "신념"을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확충하려다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종종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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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안 그런" 경우에 대해서는 좀처럼 공감하지 못한다.
이렇게 주입된 가치관은 견고히 재생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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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는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가해자 역할을 할 때, 이들은 마치 정의의 이름으로 학살을 서슴지 않았던 "십자군 원정대"처럼 동년배들의 어떤 집단을(수능성적으로 층위가 낮은 학교) 멸시한다.
그래서 놀랄 정도의 비논리적인, 하지만 확신에 찬 학력차별을 과거에 비해 훨씬 노골적인 수위에서 공격적으로 전재하는 이들이 바로 오늘날의 이십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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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멸시 대상이 될 가능성을 먼저 차단하는데 익숙하다.
"수능 시험을 망첬다"는 식의 자기방어는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동기의 구분 중에는 접근과 회피가 있다.
이를 상향지향적 접근 혹은 회피지양적 접근이라고도 한다.

보통 접근동기의 대표적인 예가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하는데
사실 신화의 내용상 피그말리온의 개인적 성향에 의해 생명을 얻은 갈라테이아를 주체적으로 보기에는 쪼금... ㅠㅠ

해서 플라시보 효과(약효가 없는 가짜 약을 투여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약효를 믿는 것만으로 실제로 병세가 호전되는 현상)를 연계하여 기억하는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 책에서는 반대의 경우로 방어기제가 흔건한 회피 동기를 말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예로는 그리스 신화 중 오이디푸스 신화가 있겠다.
(지루하지 않으니 읽어보길 권한다)

현시대 사람들에게서 차이에 대한 사고의 변화를 촉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흔히들 "틀린게 아니라 다른것"의 개념은 "차이(혹은 차연)"에 대한 좀더 사려깊은 의미 부여가 필수적 이다.

단순히 "저 사람은 나와 다른것일 뿐이야"로 사고를 종료하면 쉬운 표현이지만 휘발성이 강하다.

데리다의 주장에 의하면 "의미(정의)"라는 것은 어떤 고정된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의 "차이"에 의해서만 구성된다고 한다.

즉 기준이 되는 고통의 측정값도 있을 수 없고 명문대학이라 불리우는 대학의 기준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정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변화(기표의 미끄러짐)하는 의미를 고정된 신념을 수용할때 발생하는 건 주체의 상실 뿐이다.


공동체성에 기반한 과거형 학벌은 그 집단에 속함으로써 얻을 긍정적인 효과가 미래에 존재하기에 그 집단의 논리에 순응하는 것을 전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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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엔 학벌이란 말에 공동체적 측면이 있었지만,
바로 그 점에서 학력위계주의는 역간 궤를 달리한다.
학벌이 형성돼 대학서열이 만들어지는 형태가 아니라,
그 존재하는 서열을 지킴으로 "학력"의 객관적 차이를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태도로 그 의미가 변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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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학벌 담론의 핵심은 명문대생이었고, 주로 이에 대한 비판이 그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멸시용 학력주의로 전화되었을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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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과시하느냐"에서 "누가 멸시받느냐"의 문제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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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점수의 차이를 모든 능력의 차이로 확장하는 식의 사고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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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화된 학교 기반으로)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스스로 자신보다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택한다.
그렇게 멸시는 합리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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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사회에서의 개인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이 어떤 부류인지를 드러낸다.
오늘날 이십대들이 대학이라는 맥락을 소비하는 방식도 이와 마찬가지다.

멸시와 방어기제


오찬호 작가는 이러한 사회화를 와각지쟁(蝸角之爭 : 달팽이의 촉각(觸角) 위에서 싸운다 - 하찮은 일에 목메고 다투는 행위)으로 단순(?) 묘사하지만,

이 부분에서 나는 미셀푸코의 규율권력(Disciplinary Power)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대표저서 [감시와 처벌]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규범화(규율) 권력은 동질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일탈을 측정하고 수준을 정하며 전공을 고정하고 차이를 서로 적합화시켜 유용하게 만듦으로써 이 권력은 개인화를 행한다
"

얼핏 듣기에 개별성의 존중을 말하듯 보이지만 풀어보면....
규율권력은 감시(페놉티콘의 예시와 같이 늘 감시당한다는 인식 : 자기 통제)를 통해
인간을 다양한 미시적 기준아래 정량화 하는데
개인간의 차이(일탈)을 측정하고 개개인의 수준을 결정하며 개인의 기능이나 주체성까지 능력에 최적화된 전문성에 고정시키고
이렇게 결정된 개인의 개별성을 나름의 유용한 수단으로 만들고 주체적이 아닌 유형화된 개인을 구성한다.
결국 미시적 차이를 통한 위계화된 유형 구분으로 개인을 관리하는 현대 사회 권력의 행위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를 경영할 줄 안다!"는 기업가적 자아..
이것이 바로 지금의 대학이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바람직한 이십대의 표본이다.
즉 인생을 효유성의 개념으로 재단하는데 익숙하고 능숙한 이십대들이 앞으로도 더 많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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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들은 스스로도 본인들을 구조의 피해자로서가 아니라 구원의 대상으로 이해한다.
그러면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 "변혁"이 아니라 "일단 살고 보자"가 중요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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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문화란 미디어가 끊임없이 자수성가의 성공 이미지들을 "고난극복기"스타일로 재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자기개발에 빠지게끔 유도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희생을 통한 미래의 성공이 마치 성형 수술이나 다이어트 프로그램에서 추한 before를 벗어나 화려한 After로 변신하는 것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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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통제형 자기계발에 부화뇌동하게 되었고,
그 자기계발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 부분은 스스로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효율성만으로 사람들을 재단하고 상품화하는 실용주의적 사고를
브뢰클링의 [기업가적 자아] 와 보드리야르의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이미지(하이퍼리얼리티)에 미혹된 현대인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푸코가 구분하는 정상과 비정상 중 자기통제형 자기계발을 정상으로 규정한 사회구조 속에서 간헐적으로 힘겹게 호흡하는 현대인들의 모습과도 상통한다.


힐링은 사회적 압박으로 인한 고통을 치유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걸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게끔 한다.
당연히 사회구조는 늘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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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평준화 논리마저 생성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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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하는 자아(사회적 잉여)가 많아질수록
또 힐링은 곳곳에서 환영 받는다.
그러는 가운데 경쟁사회의 야만성에는 어느덧 "합리"라는 포장이 들씌워진다.


사회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축소시키고 개인의 고통을 혁신하기 위한 사회 비판의 도구로 사용하기보다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새로운 수요처로 편입된 "힐링"에 대해서 [아프니까 청춘이다 - 김난도 저]의 내용을 바탕으로 실랄하게 비판한다.



모두가 불공정한 과정을 겪고 있다! 그러니 다 똑같은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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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깊게 침윤된 자기계발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인 나머지 일종의 "피해자 탓하기"에 익숙해져 있다.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을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정치한 방어기제를 가열차게 비판하는 문구이다.


전반적으로 은폐된 차별과 이에 순응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가감없이 20대 대학생들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어떤 사람은 3루에서 태어나 놓고 자기가 3루타를 친 줄 압니다" 는 스토브리그 백단장의 대사처럼
구조적 불평등의 은폐를 넘어 앙망하게 만드는 권력에 힘을 보여준다.

우리는 고졸 출신 자수성가한 유형을 new money라 호칭하며 격하시키고
재벌2, 3세를 old money 라 칭송하며 사회 변화를 정체시키려는 유한계급들의 선동에 여전히 놀아나고 있다.



작은 약속들과는 달리 큰 약속은 그걸 볼 능력이 대중에게는 없다.
- 브뢰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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