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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언어인간학 - 독후 2. 호모그라피쿠스 (에크리튀르)

by 홍보살 2026. 6. 22.

저자 김성도는 2강 호모그라피쿠스(Homo graphicus: '그림 그리는 인간' 또는 '기록하고 시각화하는 인간')라는 개념을 통해,
인류의 출현 이후 이미지라는 존재가 어떻게 인간 사유의 중심 요소로 자리 잡았는지 설파하는 장이다.

가급적 독후에 충실하도록 본문과 나의 견해를 간단히 서술하도록 하겠다.

호모 그라피쿠스


플라톤이 이데아의 모사 농도에 따라 에이콘(Eikon)과 판타스마(Phantasma: 시뮬라크르)로 나누어
흑백의 논리로 이미지를 양분화한 것과 달리,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는 달랐다.

"우리의 천성 속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모방(미메시스)의 본능은
인간에게 어린 시절부터 심어져 있다.
인간과 다른 동물들 간의 한 가지 차이점은 인간은 살아 있는 피조물 사이에서 가장 모방적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모방을 통하여 인간은 최초의 교훈을 학습한다는 것이다.
모방된 것들 사이에서 느끼는 쾌락 역시 보편적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 [시학] 중


"우리의 눈을 모든 빛들의 팽창의 척도로 삼자고 주장하자는 것인가?
그 결과 빛나는 물체들의 이미지들이 우리에게 지각되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그 빛의 광선이 도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독수리와 살쾡이는 우리의 연약한 시각에서 감춰진 사태로 있는 별들을 볼 수 있다."
: 갈릴레이 갈릴레오



나는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가고 싶다.
플라톤의 이항 대립적 이미지 접근이 기독교와 자본주의 지배 논리로 채용되었다면,
이와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미지들의 모방은 생득적이며 무한한 특권이자
물리적 유한성과 한계성을 넘어서게 하는 출발로 보면 어떨까?

모방을 통하여 인간은 최초의 교훈을 학습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들뢰즈의 사유로 변주해 보면
세상의 모든 이미지들의 체현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반응하며 차이를 생성하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기억의 연상 작용을 만들어내는 모든 것이 이미지다.
이러한 메커니즘에서 중요한 사실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시각과 비전,
우리가 지각하는 이미지는 현실의 복제가 아니라 하나의 해석이라는 점입니다.
(...)
이미지는 각막 이미지 속에 즉각적으로 현존하는 넘어서 존재한다고 하겠습니다.
(...)
이미지의 어원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이마고(imago)'라는 단어입니다.
이마고는 고대 로마에서 사용했던 데드 마스크를 말합니다.
(...)
바니타스: 공허, 거짓, 삶의 무상함을 의미하는 라틴어; 죽음, 허망을 상징하는 소재들을 정물화로 표현한 그림


이 부분에서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지는 부재하는 현존이며,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될 가능성이다"라고 말한 샤르트르의 말처럼
주체가 자신의 자유와 인식된 현재의 이미지와 기억의 소통 속에서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실존적 해석의 결과물로 재생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미지는 죽음이라는 유한성에 대한 저항의 체현이기도 하다.

시각 이미지는 유추적 사유이고 청각 이미지는 분석적인 것


우리의 삶 속에서 다양한 착시들을 경험하게 된다.
헤르만 격자(Hermann Grid; 흰색 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회색 점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현상)나
보색 잔상(빨간색을 오래 바라보다가 흰 벽을 보면 청록색 잔상이 남는 현상) 등등

"진리는 없다, 다만 해석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니체의 말처럼
이처럼 세상 속에는 위장된 허구와 진리가 병치된 채 흘러가는 게 아닐까?

이미지에는 디노테이션(명시적 의미)과 코노테이션(함의)이 있습니다.
'삼다수'라는 브랜드는 하나의 디노테이션이고 코노테이션은 '삼다수'라는 이름의 주관적, 문화적 연상 작용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디노테이션이 주민등록증에 나와 있는 출생 기록이라면
그 사람의 코노테이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문화적 함축으로서 고정되지 않고 무한히 열려 있는 것입니다.
사회적이고 주관적인 것이지요.

이미지의 심층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코노테이션을 우리가 읽어내야 합니다.
(...)

디지털 문명의 속도를 보면 17세기 과학혁명부터 시작하여 인류는 조금씩, 매우 빠르게 달려왔다.
균형을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지면서 삶은 제어하기 어려운 속도에 압도되고 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인간은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추격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욕망의 토대에는 이 같은 강렬함이 자리 잡고 있다.

"짧은 순간 없이 강렬함은 없다.
강한 감각은 가장 짧은 것들이다."
— 마리네티

(...)

이미지를 비판하는 이유는 이미지가 사색의 빈곤화, 가치의 혼란, 내면성의 결핍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인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이다.
그는 이러한 현실을 두고 "현실 자체가 사라진 현실(하이퍼리얼 시대)"이라고 말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이미지들을 그저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 거기에 나만의 독창적인 '사유'를 접목시켜보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독서를 하든 미디어 영상을 시청하든, 우리는 이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이미지의 농도가 결여이든 과잉이든, 우리는 사유를 통해 그것을 첨가할 수도 제거할 수도 있다.

롤랑 바르트는 사회적 규범인 랑그(Langue)와 생리적 체질인 스틸(Style)이 충돌하는 경계에서,
개개인의 선택 속에서 만들어지는 독자적인 생성을 '에크리튀르(Écriture)'라 정의했다.

바르트의 에크리튀르를 이미지를 소비하는 우리 자신에게 대입해 변주해 나의 독후감을 정리해보면....

삶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선택을 종용한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선택지를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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