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미국의 유명한 융 심리학자이자 분석가인 저자 로버트 A. 존슨(Robert A. Johnson)이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의 그림자 이론을 토대로 전문용어의 사용을 극히 제한적으로 집필한 교양서이다.

그림자란 사회적으로 소외 혹은 억압된 가치나 규범등이 개인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어두운 면을 말한다.
내가 여기서 무의식으로 축소하여 표현하는 것은 이를 전반성적 코기토(Pre-reflective Cogito)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그림자와 자아를 시소위에 좌우 대칭으로 묘사하며 둘 사이의 균형있는 중량감을 표현한다.
절대로 회피할 수 없는 둘의 관계와 대응방법을 직조적으로 소개한다.
난 저자 존슨의 제안에 더불어 심층적 동인을 샤르트르의 자기기만에서 찾아본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본문은 인용구 형식으로
나의 사견은 외부에 표현한다.
페르소나는 우리가 되고 싶어 하는 모습인 동시에
우리가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하는 모습이다.
페르소나는 심리적인 옷이라 말할 수 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바로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이미지를 대변하듯,
페르소나는 진짜 자신과 주어진 환경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한다.
자아(ego)는 진짜 본연의 자기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자신이자,
자기가 누구라고 인식하고 있는 자신이다.
이에 반해 그림자는 우리 자신의 일부분이지만 우리가 보려 하지 않거나 이해하는 데 실패한 부분이다.
그림자를 전가하는 최악의 상태는 부모의 그림자를 자녀들에게 짊어지게 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신들의 그림자를 어린 자녀애게 부가하는 경우,
자녀의 마음은 분리된다.
대한민국 입시 현실을 보면 부모가 자신의 학력 결핍 혹은 욕망에 대한 그림자를 아이에게 전가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이때의 강박윽 아이의 비자기적(주체가 거세된 : 사물화된)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고 독립성까지 훼손될 수 있다.
그림자와 자아는 충돌을 통해 본래의 전일성을 되찾는다.
우리가 영웅에게 빠저드는 것은 내 안에서 숭고한 특질을 발견하는 것보다
멀리서 남을 추앙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포이에르 바흐가 말한 신의 개념과 유사하다.
즉 영웅이라는 인위적 서사는 그림자가 제거된 이상화(초인)된 인간으로서 self 투사된 일종의 방어기제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말은 자기 안의 가장 고상하고 무한한 가치가 있는 존재를 다른 누군가에게 투사하는 것을 뜻한다...
대부분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신의 이미지를 상대방에게서 발견할 때의 체험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훨씬 고요하고 인간적인 경험인데 반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질풍노도와 같다.
결혼은 대부분 투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반드시 환상이 깨지는 시기를 겪는다.
이럴 때 배우자는 맨 처음 투사 때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저자 존슨은 사랑하는 것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구분하고 있다.
이 부분은 글쎄...
현시점 세대를 떠나 사랑에 빠지는 일이 얼마나 있을 지 모르겠다.
일과 휴식은 그 경계가 느슨해지면 둘 다 망치게 된다.
안식년과 같은 휴식이 선사하는 놀랍도록 창조적인 뇌의 reset 시간을 포기하지 말자.
휴식을 취할때까지도 일 속에 강금되어 생존하는 현대 도시인의 모습이 너무도 애처롭다.
다른 두 대극(자아와 그림자) 사이에 사로잡히면 개인적 고통이 시작된다.
하나를 수용하면서 다른 것에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역설이 모순으로 전락한다.
그 때문에 서로 다른 두 대극은 동등하게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서로 대립되는 두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둘 간의 직접적인 대응을 피한다.
이것은 대다수 현대인의 삶의 특질로 규정할 수 있다.
모순은 항상 대립하지만 역설은 싱성하다.
상호모순에서 역설로 성장하는 것은 의식의 도약을 뜻한다.
외부에 비치는 모습이 밝을 수록 반대편은 그 만큼 어둡다는 의미이다.
이 속성을 정확하게 나와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속에 녹여보면 좋겠다.
세상에 존해하는 모든 덕목은 그 반대되는 것으로 인해 타당성을 지닌다.
어둠이 없는 빛은 아무 가치도 없다.
"부재가 존재를 증명한다" 는 경구가 말하듯..
하나를 포기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해답을 찾을 가능성을 앗아가버린다.
죄책감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최책감은 역설의 값싼 내용품이다...
죄책감은 교만에서 온다.
어떤 이슈 중 한쪽을 택해서 그쪽이 항상 옳다는 확신을 하기 때문이다.
맥락상 자아와 그림자를 의미하지만 상식의 선에서 첨하면...
고대 철학자 피론이 갈파한 에포케를 알아두는 것도 좋게다.
오감으로 확인 불가한 것에 대한 섣부른 예단을 경고하고
이에 대한 판단을 보류와 지속적 탐구하자는 의미이다.
위대한 시는 도약을 통해 존재의 아름다움과 공초를 통합한다.
정반대라 생각했던 것 사이에 연결점이 있음을 깨닫는 것은 놀라움이자 충격이다.
나의 감정과 연결될 수 있어서 내 생각을 충분히 소화할 여유가 생긴다.
심오한 진리는 선과 악이 하나로 되는 것이다.
주어진 임무를 당장 수행할 것인지 좀더 오래 빈둥거리며 몽상을 계속 즐길지
갈등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그런데 이쪽과 저쪽 어느 한쪽도 신성하지 않다.
신성한 자리는 정확히 이 둘사이에서 발생하는 역설 안에 존재한다...
"그저 뭔가 하려 들지만 말고 그 자리에 멈추어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여러분을 자기중심에서 멀어지도록 만드는데,
그 이유는 행위와 존재 사이에서 둘 중 하나를 택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저자 존슨이 말하는 자아와 그림자의 패러독스(Paradox, 역설)는 이 저서의 결론이다.
샤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에서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고 설파했다.
무한한 자유(빛)에 대응하는 무한한 책임(그림자)이 공존한다는 의미하는 것은 잘 알것이다.
흔히 자아 정립 속 의식은 스스로 자신을 대상화(사물화 : 즉자존재) 시킨다.
하지만 역설의 과정을 샤르트르가 말하는 "자기기만"의 과정으로 변주해 보면 전-반성적 차원(무의식 상태)에서 의식은 사물화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는 사회 문화적으로 규정된 그림자와 자아 사이의 갈등에서 오는 현기증을 상쇄하는 방어기제이자 스스로를 즉자존재로의 추락을 방어하는 초월의 수단이 된다.
이는 대자적 존재로서 두 대극(그림자와 자아)간의 대립에서 오는 긴장감을 니체가 말하는 힘의 의지(Wille zur Macht:삶의 에너지)로 치환하고
종국에 이 둘을 통합하여 위버멘쉬(Ubermensch: 초인)의 길로 나아가는 순환 과정이 된다.
이것이 저자 존슨이 말하는 패러독스(Paradox, 역설)가 아닐까?
우리는 다양한 시공간에서 타자들과 교감한다.
공감 시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타인과의 친밀함의 표현이 과다한 경우 오해와 상처가 발생해 관계가 멀어지는 경우를 종종 보게된다.
진정한 친밀감은 표면적 접근이 아닌 깊은 인정과 자기 개방에서 비롯됨을 알게 하는 역설이다.
달라이 라마의 경구를 괴벨스식으로 변주해 보자.
말할 때 당신은 알고 있는 것만(다른 사람들이 한 말을 그대로) 반복한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면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으나(들을 생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진정한 성장은 그 순간부터이다.
빛에 다가가려 노력한다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의식화할 때 비로소 깨달음을 얻는다.
-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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