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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디오니소스의 영혼] 독후 Will you be made, or will you make?

by 홍보살 2026. 2. 9.

저자 마시모 도나와의 대화는 그의 이력(연주자이자 철학자)만큼이나 무척이나 흥미로왔다.

100쪽 정도의 작은 분량이지만 심도있는 대화로 많은 생각들이 정리되는 시간이었다.


도나 교수는 내게 말한다.

홉스의 리바이던에서 차용한
호모 호미니 루푸스(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선과 악,
카오스(Chaos)와 코스모스(Cosmos),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진리와 오류등의 베타적(상호 수용 불가한 것)으로 보이는 "다른 것"

즉 보편성 안에 가둬진 타자의 시선(혹은 타자의 시선속에 투사된 나의 시선)속에 상실된 주체의 사물화 혹은 대상화의 오류가

역설적으로 수동적 자기기만과 적극적 자기 부정의 대립적 여정 속 차이를 만들며 스스로 초월(위버멘쉬 : Übermensch)할 수 있는 동력으로 치환된다고 말한다.

이때 술은 무지의 황혼에서 달빛을 염원하는 현현의 로고스로 묘사된다.^^


will you be made, or will you make


그럼 본문과 나의 생각들을 두서없이 써내려가 보겠다.

정말이지 술은 니체가 단순한 샘물에서 발견했던 진리를 '감성적으로도' 이해하도록 우리를 돕고 있다.

다시 말해 선과 악은 우리가 똑같은 실체에 부여한 두 가지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아찬가지로 유한과 무한은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의 똑같은 가면이다.

디오니소스가 진정한 아폴로적인 표현들 속에서 살 수 있듯이
아폴로 또한 본질적으로 디오니소스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술의 마법은 '진리가 행위의 관점에서도 어쩔 수 없이 이중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언제나 그 게임 안에는 두가지 요소가 공존하고 있다.

피지스(physis:자연)의 무분별한 의지와 인간 이성의 끊임없는 예측이 바로 그것이다.


진리가 악에 대한 선의 구별을 주장하는 로고스의 보다 깊은 심장부에 침식된 존재, 이성적 요구의 구조적인 비이성,
그 자체의 모순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중용(中庸)과 니체의 경구로 대체될 것 같다.

사실이란 없다. 오직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다.


진리는 허구의 피난처이고,
니체가 잘 알고 있얼던 것처럼 서양 논리에서 "가짜진리'와 같은 하나의 성체이기 때문이다.

진리로 가장된 단순한 오류들이자 순수한 위선들이다.

위대한 독일 철학가가 "군중 의식"이라고 정의한 그것과 일치하는 환영이다.

니체는 교회가 군중 의식에 기초하고 정당화되는 권력의 형태로 변화된 것을 비판한다.



작금의 대한민국 기독교 보수화와 극우성향의 아스팔트 부대를 보며 두 현자의 경구를 첨한다.

군중은 진실을 갈망한 적이 없다.
구미에 맞지 않으면 증거를 외면해 버리고 자신들을 부추겨 주면 오류라도 신처럼 받드는 게 군중이다.

- [군중심리] 구스타브 르 봉



인생을 쉽게, 그리고 안락하게 보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무리 짓지 않고서는 한시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 된다.

언제나 군중과 함께 있으면서 끝내 자신이라는 존재를 잊고 살아가면 된다.

- 니체


"다른 것"은 단지 나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나 자신은 나와 대비되는 것들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의 실체 안에서" 수동성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능동성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

결국 다른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자신에 대한 표명이 스스로에 의해 부정되어야 하는 인식의 로고스


자신과 위선을 구별하지 않는 것,
즉 원래부터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거짓을 자신으로부터 분리하지 않는 것에서 자신은 구별된다.

그리고 이러한 전개 안에서 오류의 불가능성이 인정될 것이다.
다시말해 오류의 구조적인 인피르미타스(연약함)가 존재할 것이다.
결국 오류는 최종적으로 표명된 진리를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바로 오류를 흡수하면서 그 자신에 대한 구별과 오류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근원적인 오류의 표현 역시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진리의 표현이다.


위대한 철학은 바로
"의미에 대한 질문은 근원적으로 무분별한 상태에 대한 완벽한 표현"임을 정확하게 이해 하는 것..


인식은 무의식에 의해 고무된다.
"생각하다"라는 말은 이 내면의 직접적인 동요로 이해되는 사고들이 결합 작용을 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일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는 단순한 현존 앞에서 완벽하게 수동적이다.
존재의 사실은 근원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나에게 드러난다.
나의 존재를 결코 내가 결정하지 못한다.
따라서 최초의 상대성은 더욱 미스터리한 것으로 다가온다.


그 누구도 존재를 선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존재한 것에 있다.
존재에 대해 우리가 깨닫는 바로 거기에서 나의 존재성이 부여된다.



도나 교수가 실존주의 철학을 불러온 것 같다.

목적없이 피투된 삶에서 실존의 첫발을 내딛는 찰나의 벅찬 감성이 공유된다.



술을 마시되 이치에 맞게 마시는 것,
이것은 바로 모순 속에 있되 그 모순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이를 통해서 우리의 실존을 구성하고 있는 모순들을 하나하나 파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표명이 스스로에 의해 부정되어야 하는 인식의 로고스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똑같은 행위 안에 자신의 차이를 두었을 때인데.
자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자신의 차별화를 이끌어내는 단계를 말한다.
자신에 대한 부정이 진정한 긍정으로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를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차이"란 단순히 타자의 반대가 아니라 구조적 보편성(획일성)에 갇히지 않는 변화의 동력이며

삶은 이 차이들의 수용과 비판의 순환속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라 했다.

같음에서 차이를 수취하는 과정은 호흡이 남은 순간까지 지속된다.




아래는 마지막 페이지 도나 교수의 이 책의 전반에 걸처 설파한 내용의 압축이다.

"오류의 입구" 선과 악의 경계 그리고 차이를 만드는 바로 그 지점에 대한 문학적 표현이 멋지다.^^

진리에 대한 여정은 어쩌면 극적인 모험에 뛰어드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오류의 입구에 매달려 있는 것에서,

구조적으로 출처가 불분명한, 즉 허용할 수 없는 자신의 내면에서,

그 자신의 근원적인 "불가능성"에서,

게다가 가장 철저한 부정의 흔적위에서 나타나기에...




마지막 페이지가 끝나갈때 도나 교수는 내게 질문한다.

"Will you be made, or will you make?"


"divide and rule" 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압제된 시선은 모든것을 배타적으로 분할한다.
선과 악도 사실상 나의 자유 의지와 무관한 분류체계에서 생성된 것들 중 하나이다.

삶은 OX 게임이 아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을 수도, 모두를 선택할 수도 있다.
물론 그 여정중에 넘어져 절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절망 속 침전된 희망을 인식할 시선이면 충분하다.

이것이 내 사유함의 이유이다.

#디오니소스의 향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