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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인정욕구의 맹아 '사랑' 그리고 빈둥거림 [사랑의 기술] 독후

by 홍보살 2025. 12. 19.

포르투나가 지배하는 운명의 수레바퀴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인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프롬의 측은지심

상품화로 전락한 인간

자본의 소유자는 노동력을 사서 그의 자본에 대해 가장 유익한 투자대상을 위해 일하도록 명령할 수 있다.
노동력의 소유자는 굶어죽지 않으려면 현재의 시장의 조건에 따라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이러한 경제구조는 가치의 계층을 반영하고 있다.
자본은 노동력을 지배한다.
축적된 물품, 다시말하면 사장된 물품이 노동력이나 인간의 힘이나 살아 있는 것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후로 자본주의의 기본구조이다.
...
현대인의 주요 목표는 그의 기술, 지식, 자기 자신, 그리고 personality라는 상품을 다른 삶과 유익하게 교환하는 것이다.
... 공정한 교환이라는 원칙 이외에는 아무런 원칙도 없고, 소비한다는 만족 이외에는 아무런 만족도 없다.


자본주의가 초래한 인간의 상품화 그리고 고도화 모든 것이 교환가치 하나로 매몰된 현실 사회에 대한 통열한 비판이다.


개인이 감정을 가질때, 공동체는 비틀거린다.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연결이 가능할 것 같다.
물론 프롬은 분명 자본주의와 연결한 부분이다.
난 전체주의가 만들어지는 과정의 속 공포가 떠오른다.


모든 것이 소비되고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것이다.
세계는 우리들의 식용에 대해 하나의 커다란 대상, 컫다란 사과, 커다란 병, 커다란 유방이 된다.
우리는 젖을 빠는 자이고 영원히 기대하는 자이고 희망에 가득 찬 자이다.
그리고 영원이 실망하는 자이다.
...
모든 것은, 물질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대상도, 교환과 소비의 대상이 된다.


공생적 융합관계인 수동적인 갈애(渴愛)에 익숙해진 현대인에 대한 환유적 표현이 아닐까 싶다.

사랑에서 사람들은 마침내 고독으로부터의 안식처를 찾아낸다.
사람들은 세계에 대항하는 두 사람 사이의 동먕을 형성하고
두 사람만의 이기주의는 사랑과 친밀감으로 오해된다.
...
억압된 목표를 가진 사랑은 사실상 원래는 감각적 사랑으로 가득 찬 것이었고 인간의 무의식적인 마음속에는 아직도 그러하다.


실상은 자위(최소한 타자를 수단화하지 않고 욕구를 충족한다)보다 못할 수도 있는 시뮬라시옹 속에 안주한 현시대의 사람들의 사랑관...
대표적 사회적 이슈인 부동산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러하다.
'언제까지 얼마를 모르고 언제까지 집을 장만하면 아주 편안한 노후가 기달리꺼야'


프로이트 사상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에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자본주의 정신에 일어난 변화 때문이었다.
자본주의 정신은 절약의 강조로부터 낭비를 강조로,
경제적 성공의 수단으로서의 자기억제로 부터 끊임없는 시장확대의 기초로서의,
그리고 불안하고 자동기계화한 개인의 주요한 만족으로서의 소비의 강조로 변했던 것이다.
어떠한 욕망의 충족이든지 지연시키지 말라는 것이 모든 물질적 소비의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적 분야에서도 주류로 되었다.

최근의 모든 경제뉴스를 보면 알 것이다.
80년대 저축을 강조했다면 근래 경제뉴스는 모두 소비에서 시작해서 소비로 끝난다.
부동산에 묶인 돈때문에 소비가 위축되어 경제순환구조가 막힌다는 등등...



캥거루족
(마마보이)들은 아직도 어린애 같은 감정을 갖고 있다.
그들은 어머니의 보호, 사랑, 따뜻함, 배려, 칭찬을 바라고 있다.
그들은 어머니의 무조건적 사랑,
곧 그들이 필요로 하고 그들이 그녀의 자식이고 그들이 무력하다는 것 이외의 다른 이유 없이 베풀어지는 사랑을 바라고 있다.
이러한 남자들은 그들을 사랑하도록 여자를 유인하려고 할때, 그리고 이에 성공한 다름에도 매우 정답고 매력적이다.
그들의 여자에 대한 관계는 표면적이고 무책임하다.
그들의 목적은 사랑받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
어머니에 대한 집착은....
어머니의 모든 것을 받아 들이는...
자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소망이다.


여전히 어미 캥거루 주머니에서 분리되지 못한 시대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데리다가 말하는 해체나 샤르트르가 말하는 무화를 거부하고
초월적 사랑의 향수에 도취된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은 결국 사랑도 받기만을 바란다.
사랑하는 대상을 바라볼 때의 그 설레임과 퍽찬 감정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현대인은 과거나 미래에 살고 오늘을 살지는 못한다.
현대인은 감상적으로 어린 시절이나 어머니를 회상하고,
또는 미래에 대한 행복한 계획을 세운다.
다른 사람들의 가공적인 경험에 참여함으로써 대상적으로 사랑을 경험하든,
또는 사랑의 경험이 현재로부터 과거 또는 미래로 옮겨지든,
이와 같이 추상화되고 소외된 사랑의 형태는 개인의 현실적 고통과 고독과 분리감을 완화시켜 주는 마취제로서 작용한다.

현재로부터의 도피 그리고 소외되버린 자아가 소실되어가는 과정을 설파하면서
개인의 추상화된 미래 조차 이미 규정된 조건에 포획된 상태로 설명한다.
이러한 공허함으로 가득찬 개인에게 사랑이란 공생적 융합상태에서 분리될때의 불안감을 잠시 잊게 해주는 몰핀과 같다는 것이다.

투사의 또 하나의 형태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어린애들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일반화할 생각은 없으나 대한민국 부모들 중 다수가 자신의 학벌에 대한 자격지심을 아이에게 투사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과연 누구를 위한 학벌에 대한 욕구인지 스스로가 잘 새겨보아야 할 부분이다.


두사람이 서로 그들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
오직 이러한 '핵심적 경험'에만 인간의 현실이 있고
오직 여기에만 생기가 있고 오직 여기에만 사랑의 기반이 있다.
사랑은 이와같이 경험될 때에만 끊임없는 도전이다.
사랑은 휴식처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고 일하는 것이다.

90년대 CF 대사 중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라는 말이 떠오른다.
I와 Me의 끝없는 해체의 과정 이때 다다르는 공생적 융합에서 분리된 실존적 자아
그리고 상호주관적 인정의 관계로 나아가는 사랑.

그래서 사랑안에 머무름(standing in love)은 역동적이며 상보적인게 아닐까?



형제애가 비개인적 공정성에 의해 대체된 것처럼,
신은 멀리 떨러져있는 '우주'라는 주식회사의 사장으로 변했다.
당신은 신이 저기에 있고 신이 쇼를 연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당신은 신을 결코 보지 못하지만 당신이 '당신의 역할을 수행하고'있는 동안에는 신의 리더십을 인정하고 있다.

정치한 사회 시스템에 포획의 단계를 넘어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멍에,
마치 포르투나가 지배하는 운명의 수레바퀴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인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프롬의 측은지심.

현대인은 빈둥거리고 싶어하며 더 좋은 말을 쓴다면 긴장을 풀고 싶어한다.
게으름을 피우려는 이러한 소망은 주로 생활의 규격화에 대한 반발이다.

안식년이란 말이 있다.
안식년의 참된 의미를 헤아리자면 이따금 마주하는 빈둥거림은 단순히 사회적 규범이나 획일적인 생산성 논리에 대한 반발을 넘어,
내면의 성찰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다음 도약을 위한 단단한 지반을 다지는 지혜로운 지렛대와 같은 과정이라 생각한다.

현대인은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지 못할 때에는 무엇인가,
곧 시간을 잃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해서 얻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할지 알지 못한다.
...
훈련이 외부로부터 부과된 규칙처럼 실행되어서는 안되고 자신의 의지의 표현이 되어야 한다

이어지는 맥락이고 개인적으로 시간을 촘촘하게 사용할때의 만족감도 무시할 수는 없다.
다만 빈둥거림을 비난하는 것도 구조적 사고관이라 생각한다.

난 과거 책이 수면제와 같았다.
나의 독서 훈련은 자발적으로 지하철 출퇴근 시간을 활용했고 지금은 정착하여 책을 놓으면 불안한다.
주말이면 산행 중 오디오 북과 함께하고 태백행 기차에서 독서를 병행하고
평일 점심시간에는 위장에 음식을 구겨넣는 수고를 독서로 대체한다.
나의 경우 취향의 문제로 외면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일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처음부터 익숙하게 즐길 수 있는 놀이는 많지 않다.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것은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람의 능력의 조건이다.

홀로 밥을 먹을 수도 있고 홀로 산에 오를 수도 있고 홀로 여행을 갈 수도 있다.
홀로 있을때 I 와 Me의 Feedback Loop 는 선순환되고 이는 공감의 지평이 뻗어 나간다.
이는 더 많은 타자를 수용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 동료,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는 상품으로 변하고 자신의 생명력을 현재의 시장의 조건 밑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이익을 가져오는 투자로서 경험한다.
인간관계는 본질적으로 소외된 자동기계의 관계이고,
각자는 군중과 가깝게 함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따라서 사상이나 감동이나 행동에 있어서 군중과 다른 점이 없다.
...
(현대인의) 모든 활동은 경제적 목적에 종속되고 수단은 목적이 되었다.
인간은 잘 먹고 잘 입고 있지만 각별히 인간적인 자신의 자질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조금도 궁극적 관심을 갖지 못한 자동 인형이다.

이 문구를 누군가는 집단의 응집력 속 생명보존과 번식을 위한 본능적 생존전략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포틀래치'가 미덕인냥 자수성가한 사람에겐 졸부라는 표현으로 'new money'라 비아냥 거리고
태어날 때부터 3루에 있는 재벌 자식들에겐 품격을 말하며 'old money'라 칭한다.

마르크스 '소외'의 개념과 관통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프롬이 [사랑의 기술] 내내 서술한 내용의 핵심이다.
배금주의가 만든 화폐의 추앙과 무한증식에 대한 탐욕으로 인한 인간의 소외와 그로 인한 관계의 왜곡과 상품화.
이에 대한 저항을 인정욕구의 맹아인 사랑에서 찾으려는 프롬의 절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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