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투쟁" 독후감을 작성하면서 연관 지어 함께 다루고 싶은 책들이 떠올랐다.
[소비의 사회, 시뮬라시옹] - 보드리야르, [유한계급론] - 베블런, 그리고 오늘 다룰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이다.
대부분의 철학이나 사회학 등의 학문들이 촘촘하게 연결된 것은 사실이지만, 콕 집어 연결하며 살펴보고 싶어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저자인 에리히 프롬은 1세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이기도 했고,
[계몽의 변증법]으로 유명한 아도르노와 동시대에 활동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는 [사랑의 기술], [자유로부터의 도피] 등이 있으며,
실존주의, 유물론, 도가, 포스트구조주의, 칸트, 헤겔 등 다양한 현자들의 생각과 감성이 프롬의 펜 속에서 따스하게 묻어 나온다.
자세한 프롬의 사상이나 지향점 혹은 지양점등은 책의 내용과 함께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가급적 3회차 이내로 정리하는 걸로~~~

책의 속지조차 열어보지 않고 제목만 보고 구매한 사람들에 대한 경고로 이 책은 시작한다.(빵터짐 ^^)
사랑의 기술에 대한 편리한 지침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실망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몇 페이지도 넘기지 못하고 닫을 것이다. ㅋㅋ
고미숙 작가의 말을 빌려보면 "작업의 기술" 로 착각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격하게 공감하는 인트로 문구이다.
나역시 짧은 삶을 반추해 보면 사랑하는 대상을 바라볼 때 나의 시선이 사랑 받을때의 시선보다 미소로 번지는 시공간이 더 찌인~ 했던 것 같다.
사랑하게 되었다는 느낌은 보통 자신의 교환 가능성의 범위 내에 있는 인간상품에 대해서만 나타난다.
실존주의 사상의 타자(他者)의 사물화를 넘어,
사랑의 관계를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기호화, 즉 교환가치를 기준으로 하는 정량화된 소비재로 치환되었다는 말이다.
부르디외가 그의 대표저서 [구별 짓기]에서 말했던 경제자본을 토대로 한 직업, 학벌, 가문 등의 다양하나 균질한 문화자본으로 정량화된 아비투스(habitus)가 소비재의 가격을 규정한다.
현대인의 사랑 감정 또한 자신의 아비투스 등급과 동일하거나 상향된 아비투스만을 선별적으로 수용한다는 의미이다.
(사랑하는)그들은 강렬한 열중이 곧 서로 '미처 버리는'것을 열도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현대인들의 '사랑에 빠지는 것(falling in love)'에 대한 편협된 사랑의 사고관을 비판하는 문구다.
사랑은 '사랑 안에 머무는 것(standing in love)'의 과정과 실천임에도 불구하고
남여간 초기의 강렬한 융합 욕구만을 사랑으로 외치는 현시대 인스턴트하게 소비되는 사랑의 관점에 대한 저자의 비아냥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설파하고픈 사랑의 기술과 실천이 왜 필요한지를 말하는 부분이다.
분리의 경험은 불안을 일으킨다.
분리는 정녕 모든 불안의 원천이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인간적 힘을 사용할 능력을 상실 한 채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다.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 그리고 헤겔, 미드, 호네트가 말하는 사랑의 원초적 대전제인 어머니로 부터의 분리 그리고 산업화에 따른 자연(혹은 공동체)과의 분리에 따른 불안과 공포로 인한 좌절과 재통합(융합) 욕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마치 샤르트르가 말한 피투된 상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치하고 싶다는 자신의 욕구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기호에 따르고 있으며 자신은 개인주의자이고 스스로의 사고의 결가로 현재의 견해에 도달했으며,
자신의 의견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의견과 같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실존적 ego 에 대한 자기기만을 비판한다.
샤르트르가 말한 자기기만과 무화의 선순환 과정이 사라지고 강력한 구조안에서 고도화된 자동인형(프롬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 맹종을 뜻한다)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고정된 시선의 해체가 절실한 시점으로 보인다.

평등, 만인은 각기 목적이고 목적인 한에서만 동등하며 서로 수단이 되는 일은 결코 없다.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애서 평등은 추상적 동일성, 곧 같은 일터에서 일하고,
같은 오락을 갖고, 같은 신문을 읽고, 같은 감정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동일성을 의미한다.
현대사회는 이러한 비개성화된 평등이라는 이상을 설교하고 있다.
동일한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각기 다신의 욕망을 따르고 있다는 확인을 갖게 하는 것
칸트의 향기가 물씬하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의 구절 역시 평등이라는 대전제를 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자본주의가 표방하는 평등은 '보편성'이라는 틀 속에서 나의 모든 관점과 해석을 독점할 뿐만 아니라
가장된 자유와 시선을 자기기만의 늪속에 묻어 버린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공서적 합일의 무의식적 지향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현대에 있어서 소비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환상,
곧 우리들 자신의 참되고 구체적인 욕망으로부터 소외된 환상을 만족시키는 일이다.
소비는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나 인격적 행위가 아니라 소비 그 자체가 인간의 강박적이고 비합리적인 목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피동화로 말미암아 인간관계도 변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인간도 양적 교환가치가 구현된 한 사례로서 경험된다.
보드리야드의 "시뮬라크르"와 거의 비슷한 개념이다.
실제보다 더 실제같은 복제품에 길들여진 인간의 자연(실제)으로 부터의 소외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소외의 개념은 마르크스와 포이에르바흐의 그 개념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본질을 벗어난 규정된 환상에 몰입된 자아의 실존적 위험을 내재하며,
이로 인해 인간의 상품화는 가속화되고 일상화 된다.
많이 갖고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다.
많이 주는 가자 부자이다.
가난은 직접 야기시키는 고통 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자로부터 주는 기쁨을 빼앗는다는 사실 때문에 수치이다"
준다는 것은 자기 시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를 주는 것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라는 대전제의 함축적 설명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들의 적극적 관심인 것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할 수 있고 응답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사랑의 필수재인 공감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sympathy(I feel for you)를 넘어선 Empathy(I feel with you) 그리고 Compassion(고통까지 함께한다)

#사랑의기술, #에리히프롬, #소비재, #시뮬라크르, #standing in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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