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으로 정의한다 vs 규정에 순응한다.
서울대생의 은어 위주의 대화에는 "배려심이 있네",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고졸 근로자의 은어 위주의 대화에는 "대화 수준이 왜그래?", "그럼 그렇지 ㅉㅉ.."
서울대생의 히피(hippy) 복장에는 "저항정신 있어", "자유로운 정신세계가 멋지네^^"
고졸 근로자의 히피(hippy) 복장에는 "옷이 경박한데 수준이 참.. ㅠㅠ", "옷입는 수준도 딱 거기까지네."
누가 서울대생에 대해서 규정하고 누가 고졸 근로자를 규정할까?
언제 어떻게 규정된 걸까?
몇년전 급식과 관련된 서울시장 후보의 표현도 아주 재미있다.
"저소득층 아이" vs "고소득층 자제"
어떤 기준으로 출신학교만으로 사람 전체를 규정할까?
사회규범 윤리라는 것이 여전히 영화 [킹스맨] 속 스켑트론(노인의 지팡이를 말하는 그리스가 어원이며 권력자의 상징)에 순응하는 것은 아닐까?
저소득층 학생은 "아이" 이고 고소득층은 학생은 "자제" 라 불려야 하는 구분은 누가 만들었을까?
부르디외는 이것을 그의 저서"언어와 상징권력" 에서 상징권력이라 칭한다.
사회적 합의로 포장된 모든 행위에는 지배계층의 권력 보존과 강화가 숨겨저 있으며 피지배계층 순응의 생산물이라 보고있다.
무척이나 암울하다.
그럼에도 부르디외는 막스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다소 과격하게(혹은 현실적인) 보이는 수행적 계몽의 메세지도 잊지 않는다.
여기서 난 구조주의자들이 책임감없고 정교함이 결여되었다 비난한 실존주의에서 탈출구를 모색해 본다.
샤르트르 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의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주관적으로 풀어보면
"인간은 끝없는 자기부정과 자아와의 단절(투기(投企, projet) : 인간은 자기를 뛰어넘어 미래로 자기 자신을 던진다. )로 가듭난 실존으로 의미(기의 記意 : signifie)를 가지며 사회적 규범속에서 규정된 다양한 목적 지향적 도구화된 기표(記標: signifiant)는 인간 자체보다 우선할 수 없다."
이 문구가 어떻게 퇴색되는지 한번 살펴보자.
문재인 정권의 주요 대선 피켓의 문구는 "사람이 먼저다" 였다.
반면 성녀리는 이것을 이렇게 바꾼다. "국민이 우선이다"
비슷해 보이지만 "사람"에서 "국민"으로의 전환은 인종/국적/남북/좌우 등의 갈라치기를 내포한다.
여성가족부 해체를 내건 그들의 분열조장이 또한 대표적이다.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베타적이다.
물론 계급화된 현실 속에서 타협없이 대치하며 살아가기에 리스크가 너무 큰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 비판도 없이 묵시적 압제에 무비판적으로 고착화된 순응이다.
사회 진화의 시작은 비판이다.
물론 샤르트르 역시 "타자는 지옥이다"라고 말할 만큼 규범 속에 매몰된 타자의 시선의 변화에 대한 부정적인 면도 표출한다.
때로는 미시적 개체 하나하나에 내린 나의 정의가 이미 생산된 약탈적 규정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아가 진정 내가 원하는 나의 삶 혹은 미래가 주체적인지 의심을 해보자.
질서로 포장된 이 세계가 실재보다 더 실제적인 그(권력자)들이 생산한 장 시뮬라크르(Simulacre) 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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