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논 화살의 역설과 물자체(物自體)
오늘은 틸리 서양철학사에서 만난 고대 철학자(BC5세기) 중 한명인 제논이다.
복사기 복합기 아니고 테스형 이전의 철학자 중 변증법 및 시간과 미분에 대한 고찰을 했고
인류 최초의 과학자로 알려진 데모크리토스(원자론)의 직계 스승으로 알려진 철학자이다.
현시점 우리에게 시간은 무엇일까?
현대 과학에서 하나하나 수수께끼가 풀리고 있으나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포리아(난제) 상태로 진행형이다.
일전 헤라클레이토스의 경구 중 가장 유명한 판타 레이(Panta Rhei :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와 맥을 함께하는
제논의 [화살의 역설]이라는 가설이 아주 재미있다.
"화살이 날아가고 있다고 가정할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화살은 어느 점을 지날 것이다.
일순간(찰나의 순간) 동안이라면 화살은 어떤 한 점에 머물러 있을 것이고,
그 다음 순간에도 화살은 어느 점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화살은 항상 머물러 있으므로 사실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이공계의 시야로 보면 찰나의 순간을 미분한다는 의미인데 그 이동값이 0이니 일종의 페러독스로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고
문과의 입장으로 보자면 그냥 화살이 지나가는데 뭐라는 거임?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누가 이과생 아니랄까봐 이렇게 건조한 얘기를 하자고 한 것은 아니다.
실제 머리 아픈 시공간에 대한 정의는 과학자들이 해결해 주리라는 믿음만 확고하면 되니까...
다만 삶속에서 시간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흔히 우리는 시간에 대해 몇가지 유형으로 대응한다.
시간을 흘러가는데로 천천히 지켜보는 것과
반대로 늘 쫓기며 등뒤에 위치를 고정시킬 수도 있다.
가령 느린 속도의 도보로 숲길을 걷고 있다고 가정하자.
나무와 풀과 꽃들 하나하나가 보이고 원거리의 다른 공간의 숲이건 강도 수정체의 두께 조절로 망막에 안착시킬 수 있다.
반대로 KTX 안에서 창밖 풍경을 바라본다고 가정하자.
300Km/h 속도는 최대한 원거리의 풍경만을 전경으로 환원이 가능케 할 뿐,
근거리 찰나의 순간은 모션 블러(Motion Blur : 움직이는 오브젝트가 이미지 전체에 줄무늬로 보이는 현상)로 처리된다.
이것을 사회적 시선으로 전환할 경우
Public(보편적 가치 혹은 사회적으로 타협 혹은 강요된 가치)한 시선에 매몰되면
Private(개별적)한 소중함과 가치는 모션 블러(Motion Blur)로 외면될 수 있지 않을까?
비용과 편익 혹은 귀차니즘을 볼모로 객체의 단편적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 만으로 모든 것을 귀결하고 있지는 않을까?
세상의 흐름속 지연효과(Delay effect)는 수많은 곳에서 관찰할 수 있다.
우리나라 절기중 하지(夏至)는 6월 21일 혹은 22일이다.
하지만 정작 가장 높은 기온을 나타내는 시기는 7월 중순전후인 경우가 많다.
1개월의 기간동안 가열의 시간(duration)이 필요하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느린 시선(기다림)이 필요하다.
비록 제논이 말한 화살의 시간을 미분화 시키면 의미없는 패러독스가 되겠지만
찰나의 순간을 임마뉴엘의 물자체(物自體, 독: Ding an sich, 영: thing-in-itself - 존재하나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것)로 대입해 보면 어떨까?
느리게 걷기는 그 찰나의 순간을 뇌건 가슴의 도움으로 환원 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모든 관계속 나무와 숲은 모두 중요하다.
숲은 시비지심으로 나무는 측은지심으로 시선을 바로잡고 수오,사양지심은 대자적으로 타자에게 다가간다.
느리게 걸어보자.
시간도 실존적이며 정태적일 수 있다.
난 완행열차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