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시대 20대 젊은 헤겔이 정의한 "사랑"은....
"사랑관계 속에서 인정 되는 것은 형상화되지 않은 자연적 자신이다."
[예나 실재철학(Jenaer Realphilosophie) - 헤겔]

주관적 해석을 해보면(태클 금지)
홀딱 벗겨진......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규정되지 않은 의식의 날것 상태로서 무뎌진 가면 속 타인끼리 상호간 인정 하고 통합하는 과정 속 생성된 스토르게(Storge : 혈족애) + 에로스(Eros) 로 해석하고 싶고
이후 절대정신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첫번째 단계로 보인다.
물론 가족간의 관계 특히나 부모 자식간의 상호 관계(에로스가 배제된 스토르게) 속 투쟁을 뜻하지만 난 조금 확장해서 말해 보고 싶다.

예나(Jenaer)시대를 넘어 작금의 배금주의 시대와 마주해 보면 어떻게 변주할 수 있을까?
이미 삶속 모든 가치를 등질화하여 탐욕의 무한 증식을 정당화 시켜버린 화폐에 저항하는 ...
나아가 화폐가 만들어낸 전체주의와의 투쟁 속 상호직관이 투쟁이 아닌 반성과 화해로 ...
역시나 무한 증식하는 결핍을 애써 숨기지 말고...
타자는 결코 내가 이해하거나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무한하다.
[전체성과 무한 - 레비나스]
보다 넓은 포용력을 품은 창발적 개념의 분화는 불가능한가?

"열역학 제1법칙(=에너지 보존 법칙)"에서 에너지는 형태만 변화될 뿐 새로이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고 총량을 유지한다고 말한다.
비슷한 의미로 도덕경 속 물은 자체의 원자(본질)는 변치 않으면서도
물잔에 담기면 잔의 모양을 따라가고
강에 흐르면 강의 형태를 취하며
끊임없이 낮은 곳을 향해 두려움 없이 흘러간다는
노자의 핵심 사상인 상선약수(上善若水) 도 맥을 함께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종국에는 수소(H)로 돌아간다.
작금의 시대는 불쾌하다.
그럼에도 인간 스스로의 창조물에 의해 예속된 양태(樣態)로서의
"돈"이 지배하는 이 순간도 그저 도야(陶冶)의 과정일 수도 있다.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에 다다르는 과정역시 잔잔한 우상향이 아닌 생동적이며 변화무쌍하다.
인간의 변화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나약한 회피가 아닌 용기로 치환하자.
스피노자의 존재론적 필연 위에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소외를 살짝 얹혀볼 때
호모 사피엔스는 삶의 지평속 유적존재로서 생득적으로 코나투스(conatus)를 지향하며 생존했다.
편견없이 날것 그대로의 상호 직관하는 관계 속 맹목적아며 격정적인 떨림을 즐겨 보는건 어떠할까?
'끄적끄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진보 : 기만과 쟁투의 반복 (1) | 2025.11.13 |
|---|---|
| 유예(猶豫) 와 포용(包容) (1) | 2025.11.12 |
|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무엇이 좋은가 (2) | 2025.10.30 |
| 아보하 (2) | 2025.10.20 |
| 집착 (1) | 2025.10.20 |